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964 도쿄 올림픽 (문단 편집) == 진행 == 대회 전의 이슈는 [[신흥국 경기 대회]]를 둘러싼 논쟁이었다. 신흥국 경기 대회 참가선수에 대한 자격정지처분을 둘러싸고 논란중이었던 [[북한]]과 [[인도네시아]]를 참가시키기 위해 대회 위원회에서 노력을 하였지만 결국 두 나라는 대회 개최 전날에 취소통보를 내린 뒤에 올림픽을 참가하지 않았다. 특히 북한은 이른바 "가네포" 사건[[http://theme.archives.go.kr/next/internationalSport/olympicGameA.do|#]]으로 자국의 주요 선수들이 출전을 박탈당했다. 이 때문에 북한의 첫 출전은 국호 문제 등이 겹쳐 [[1972 뮌헨 올림픽]]까지 미뤄진다. 또한 [[중국]]과 [[대만]]간에도 논란이 일어났는데, 당시 중국이 [[국제올림픽위원회|IOC]]를 탈퇴한 상태였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참가하지 않았고 대신 대만이 [[청천백일만지홍기]]를 당당히 앞세우고 출전했다.[* 일본어로는 중화민국(中華民国)으로 표기되었으나 영어로는 '''대만(TAIWAN)'''으로 표기.] [[남아프리카 공화국]]은 [[인종차별]] 정책인 [[아파르트헤이트]]를 시행중이었고 이게 올림픽 정신에 위배된다고 판단한 IOC로부터 제명당해서 강제로 불참했다. 이후 남아공은 28년 뒤, 아파르트헤이트가 폐지되고 나서인 [[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]]이 되어서야 올림픽에 다시 복귀할 수 있었다. [nicovideo(sm24657490?ref,width=640,height=360)][* 당시 개막식 라디오 중계 영상이며, '''무려 풀버전이다.'''] 대회 개회식에는 당시 일본 덴노인 [[쇼와 덴노]]가 참석, 개회 선언을 했다. [[옥음방송]]을 통해 [[제2차 세계 대전]]의 항복을 선언한 지 19년 만의 공개 육성 연설[* 히로히토는 2차 대전 패전 이후에는 공개 육성 연설을 매우 자제했다. 전후에 딱 3번 공개 육성연설을 했다. [[아키히토]]와 [[나루히토]]는 히로히토보다 재위 기간이 짧음에도 공개 육성 연설 기록은 더 많다.]이었다. 또한 개막식의 절정을 장식하는 성화봉송 최종주자는 [[1945년]] [[8월 6일]][*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, 이날은 [[태평양 전쟁]] 말기 광기로 치닫던 일본 제국의 전쟁의지를 완전히 꺾어버린 [[원자폭탄]]이 투하된 날이다.] [[히로시마시|히로시마]]에서 태어난 사카이 요시노리(坂井義則)라는 청년이었는데, 이를 두고 [[일본의 피해자 행세|일본의 침략 및 전쟁범죄 책임을 희석시키고,전쟁의 피해자]]라는 이미지를 강조하려는 의도를 담은 것이라는 비판을 받았다.[* 사카이는 도쿄 올림픽 당시 19세로 3단뛰기 종목의 육상 선수이기도 했는데, 성화봉송만 거행하고 올림픽 출전은 하지 못했다. 2년 후 계주(이어달리기)로 종목을 바꾸어 올림픽은 아니지만 [[1966 방콕 아시안 게임]]에서 400m 금메달을 수상했고, 은퇴한 후에는 [[후지 테레비]]의 스포츠 전문 기자로 활동하다가 2014년에 향년 69세를 일기로 사망했다.] 개막식 당시 원폭 피해자에 대한 [[묵념]]을 전 관객과 선수들에게 주문한 것도 같은 맥락이라는 비판을 받았다. 올림픽 도중에도 [[중국]]이 [[1964년]] [[10월 16일]]에 '''핵실험'''을 실시하여 일본측을 더욱 난처하게 만들었다. 일본에서 인기가 높았던 [[유도]]와 [[배구]]가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으며, 일본은 유도에서 3개의 금메달과 여자 배구에서 금메달을 따오게 되었다. 일본 입장에서는 유도에서 전종목 석권을 할 수 있었으나 백인인 [[네덜란드]]의 안톤 헤싱크가 우승하게 되자 전 일본이 경악했다고 한다.[* 당시 유도는 지금보다 체급이 적어서 3개였다. 남자부 체급별 경기와 체중에 관계없이 출전할 수 있는 무제한급이 열렸다. 3개 체급을 모두 일본이 싹쓸이했는데, 무제한급 경기에서는 헤싱크가 결승에서 일본 선수를 누르고 우승한 것이다.] [[1960 로마 올림픽]]에서 맨발로 뛰면서 [[마라톤]] 우승을 차지한 [[에티오피아]]의 [[아베베 비킬라]]는 이번에는 운동화를 신고 뛰어서 세계신기록을 내면서 올림픽 2연승을 달성했다. 급성 충수염 때문에 수술을 해서 훈련량이 줄었음에도 자신이 세운 기록에서 3분을 앞당기면서 금메달을 딸 수 있었다. 그런데 수술을 받고 바로 뛸 줄은 몰랐던 탓인지, 대회 조직위에서 그만 시상식에서 '''에티오피아의 국가를 준비하지 않아서'''[* 지금은 미리 연주해둔 국가를 녹음해서 틀어주지만, 1980년대 말까지만 해도 시상식에서 국가를 직접 연주했다.] [[기미가요]]를 틀고 대충 시상식을 마무리하는 촌극을 빚었다.[* 당시 [[https://youtu.be/UPPksbPo0x0?t=475|수상 영상]]을 보면 완전히 굳어버린 표정의 아베베의 모습과 앞에 있는 영국 선수가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젓는 모습을 볼 수 있다. 기미가요가 아니더라도 올림픽 찬가라도 틀 수 있었을 것이다.] 이 일로 일본이 비판을 받은 건 당연지사였다. 그 외에 [[야구]]와 [[무도]]가 시범종목으로 채택된 대회이기도 하다. [[소련]]의 체조 선수인 라리사 라티니나는 이 대회에서 금 2, 은 1, 동 2개를 획득하여 올림픽에서만 총 메달을 18개(금 9, 은 5, 동 4)를 가져갔으며 그녀는 이 대회를 끝으로 은퇴를 하였다. 그리고 이것은 2012년 [[마이클 펠프스]]에 의해 깨질 때까지 48년 동안 보유한 올림픽 메달 신기록이기도 했다. 선수촌에서 [[불가리아]] 선수들끼리 [[결혼식]]을 올렸으며, 이것은 사상 최초의 일이기도 하다. 그리고 올림픽 대회에 [[픽토그램]][* 간이 아이콘. 예를 들면 신호등에 있는 사람 모양의 그래픽 같은 것. 다만 도쿄 이전 1936년 베를린, 1948년 런던 대회에도 장식용으로 사용되었으며, 1968 멕시코 대회에서는 사람이 아닌 사물 형태의 픽토그램이 사용되었다가 그 다음 1972 뮌헨 대회부터 사람 형상으로 고정되었다.]이 최초로 정식 도입된 대회이기도 하다. 이후 [[2020 도쿄 올림픽]]에서 이를 활용한 퍼포먼스를 선보였다. 당시 선수촌으로 쓰이던 건물들은 1965년부터 문부성 소관법인 국립올림픽기념청소년센터[* 해당 기관은 1980년부터 [[문부성]] 직속기구로 개편됐다가 2001년에 문부과학성으로부터 독립행정법인으로 분리하여 2006년에 '소년 자연의 집'을 합쳐 '국립청소년교육진흥기구'가 되었다.]로 넘겨졌고, 2001년에 개조한 덕에 개최 이후에도 놀리지 않고 나름 잘 써먹고 있는 편이다. 시설 내에는 한때 도쿄 배낭여행객에게 인기가 높았던 요요기 유스호스텔이 꾸려지기도 했으며 2012년까지 운영되었다. 코바야시 리츠의 미소녀 마작만화 <[[사키 -Saki-]]>에서 키요스미 고교의 숙소와 경기장으로 등장한 바 있으며 현실에서는 2011년과 2012년에 국제청소년연합(IYF)이 청소년 캠프를 개최하기도 했던 장소다. [nicovideo(sm24764686,width=640,height=360)] 마지막 경기였던 승마 경기가 끝나고 금일에 바로 폐회식을 시작했다. [[올드 랭 사인]]이 울려퍼짐과 동시에 사람들이 촛불을 흔들며 올림픽을 떠나보냈다. 그리고 경기장 전광판에는 'SAYONARA'[* [[파일:sayonara_1964.png|width=600]]일본어로 작별을 뜻하며, [[2020 도쿄 올림픽]] 폐막식에선 이 문구를 오마주해 '아리가토' 문구를 내보냈다.]문구가 출력되며 다음 올림픽인 [[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]]에서 다시 만나길 고했다. 여담으로 [[잠비아]]는 개막식 입장때 [[북로디지아]]로 참여했지만, 폐막식 입장때가 마침 독립한 날이라 새로운 국가의 플랜카드와 現 잠비아 국기를 들고 입장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